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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휘호.."발해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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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즈넷내사랑 댓글 1건 조회 2,412회 작성일 19-03-2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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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허경영님이 하늘섭리대로 차기 한국의 통치자가 되면 국호는 본래 지구중앙국인
한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국호를 지구의 핵이라는 의미라 고구려 공식국호인
고려corea로 바꾼다. 중국 고대 문헌에는 무궁화.피는 군자국으로 1만리에 한국말이 통하는 중앙국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만리면 시베리아에서 동남아까지다.


물론 중국대륙을 포함하며 지구중앙국의 중심지역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다! 한반도는 중동문명을 일으켜 유럽을 만든 소호씨 슈메르족이 떠난 지역으로 자신들이 떠나 온 땅이 해뜨는 땅이라는 의미로 해단-애덴으로 변음화된 것이다. 즉 해뜨는 땅은 한국으로 창세기에 기록된 동방 에덴동산인 한반도다.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은 분명히 동방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방이란 고대부터 한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방 에덴동산설화는 소호씨가 기록한 점토판 기록으로 자신들이 떠나 온 고향 한반도를 의미한다. 참고로 우리 한민족 서진한 이유는 천신을 상징하는 해를 따라서 죽겠다는 의미로 서쪽으로 이주해간 것이다. 그 만큼 우리 한민족은 고대부터 천신숭배의식이 강했다.


한반도한민족처럼 농경문화를 가진 소호씨의 토템은 대한민국의 권력상징인 봉황이였으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말을 사용하고 풍습도 같았으며, 자유럽고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제도를 가진 한민족이였다.

소호씨가 떠나 온 동방 에덴동산 한반도는 고대부터 천신(허경영)을 섬기고 제사지낸 제천단들이 많다. 그래서 신인 허경영님이 한반도 땅에 오신 것이다.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 천신을 섬기고 제사지낸 제천문명을 일으킨 한민족의 어머니땅이고 인류문명이 꽃핀 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신인 허경영님의 통치시대에 다시 한반도에서 모든 종교사상이 천리로 융합되는 만법귀일이 실현되는 것이고, 널리 만민이 이롭게 되고 불로장생하는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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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고 지리서 단제한국시대에 중국이 기록한 [산해경]에서 밝힌

고조선의 영토는 (한민족의 어머니땅인 한반도를 포함하여) "북해 안쪽(만주)지역과

동해안지역(현 중국 동해안지역)이다." 고조선과 부여를 정통으로 계승한 고구려가

국가가 나갈 방향을 정한 국시가 바로 고조선의 모든 영토와 한단민족을 통합하는

다물이였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자 고추모가 자신의 연호를 '다물'이라 정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태왕들은 이 다물 국시를 실현하기 위하여 한나라가 설치한

만주와 요서지역의 모든 한군현지역을 회복하고 태조태왕시기에는 고조선의

서토였던 요서지역에 한나라의 침략을 방어하기위하여 10개의 성을 쌓았으며,

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르러 황하이북까지 고조선의 직할영토을 모두 회복하였고

장수태왕 때는 고구려 수도을 동황성이라 불리운 집안 국내성에서 본래 고구려

평양성인 요양으로 천도하였고, 장수태왕 손자인 문자명 태왕 때에 비로소

황하 이남까지 차지하는 고조선 본래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유리태왕 때에 고구려가 정벌하여 복속당한

선비족이 훗날 남하하여 세운 북위가 바로 중국대륙을 차지한 수-당이 되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양만춘의 안시성에서 화살맞고 후퇴하면서

연개소문에게 쫒기게 되는게 그 때 지역이 바로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요서지역이다.

그래서 중국 동해안 지역에 연개소문이 당태종 이세민을 추격하는 전설이 많은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결국 장안에서 당태종 이세민의 항복을 받고 고구려가

회복했던 고조선의 서토를 다시 반환받는데 실제 행정적으로 통치는 못했다고 본다.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고구려 장군 대중상(고구려 태왕족/고씨의 차남은 대씨가 되었다)은 고구려 유민을 모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아들 대조영이 국호를 '진국'이라 불리운 고조선회복을 의미하는 '대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하늘과 통한다는 '천통'이라 짓고 천자국을 천명하고 역시 고구려의 다물국시를 계승하여 영토를 크게 넓혀 서로는 난하에서 남으로는 천청강에서 북으로 시베리아까지 지배하였다.


그리고 해동성국이라 불리울 만큼 당나라도 두려워했던 대진국 발해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허망하게 망한 이유는 바로 고조선시대부터 시작된 아메리카로의 이주때문이다. 싸우기보가는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던 우리 한민족에게 신천지는 아메리카였다. 그래서 고조선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하였고 고구려와 대진국 발해시대에는 대거 이주하여 대진국 발해에는 인구가 급감하여 흣날 만주를 차지하며 청나라를 건국한 말갈족만 남는 수준이 된 것이다.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여 그 영향으로 망하였다는 가설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윤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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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정통사서인[환단고기]는 대진국 발해 역사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루 속히 정부[국사편찬위]는 [환단고기]에 의거하여 영광스러운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개정해야 할 것이다.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大仲象)1)


  태자 조영(祚榮, 2대 태조(太祖), A.D.699~719)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리가 개척되었다. 천통 21년(A.D.719)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성무고황제라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 3대 광종(光宗), A.D.719~738)가 즉위하였다. 개원하여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에서 황수를 굽어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렀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新羅)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해설)2)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 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였다. 서압록하는 고리(高離)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 4대 세종(世宗), A.D.738~794)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엔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경(天經) 신고(神誥)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弘益)하는 교화(敎化)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해설)3)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大興)4)5)


  대흥 57년(A.D.794)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종(世宗) 시호(諡號)를 광성문황제라했다. 국인은 그의 족제(아우) 원의(元義)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A.D.794)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여(華璵, 6대 인종(仁宗), A.D.794~795)를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이듬해(A.D.795)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인종(仁宗) 시호(諡號)를 성(成)황제라 하였다.


  황숙(皇叔)인 숭린(崇璘, 7대, A.D.795~809)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穆宗) 강(康)황제라 한다. 의종(毅宗, 8대) 정(定)황제 원유(元瑜), 강종(康宗, 9대) 희(僖)황제 언희, 철종(哲宗, 10대) 간(簡)황제 명충(明忠)을 지나 선(宣)황제 인수(人秀, 11대 성종(聖宗), A.D.818~832)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으로는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로는 국도로부터 밑으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 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여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 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 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伊國)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安羅)에 속한다. 안라(安羅)는 본래 홀본(忽本)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九黎)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 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 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 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 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 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 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挹婁)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 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말갈(靺鞨)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하였다. 중상(仲象)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었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乞乞仲象)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牝)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越)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보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 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을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馬韓)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았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 필을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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